인생이 괴로움 덩어리인가

부처님 오신 날 특집 프로그램인것 같은데 엊그제 우연히 TV에서 재방송을 봤다. 제목이 “우리들의 HIP한 출가”로 유튜브에도 있었다. 평소 볼 수 없는 절의 뒷 편, 출가한 스님들의 (군대보다 더 빡센?)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재밌었다. 속세의 괴로움을 피해 도피처로 피해간 사람들로 생각하기 쉽지만 MZ 스님들을 보니 과연 불교에서 말하는 삶이, 그리고 인생이 괴로움 덩어리인가 하는 평상시 의문이 떠올랐다.

참선하는 부처


다큐의 끝부분 승가대학 4학년 성원스님 인터뷰에서 밥 값하라는 성철 스님 말씀을 새기면서 어떻게 밥 값을 할까 고민하다가 스스로 정한 밥 값이 바로 티벳어로 된 불경과 한자 불경 비교 연구하기다. “수행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엄청 많은 거 같아요. 그건 크나큰 오해거든요. 뭘 알아야지 수행을 할 수 있고 뭘 알고 있어야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만약에 알지도 못하면서 행(行)을 한다?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의 공부는 생각보다 깊고 의외로 분야가 다양했다. 그 뒤에는 신도들의 보시로 인한 탄탄한 장학제도가 있다고 한다. 정말 좋은 밥 값 주제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난 평소 부처님은 왜 삶이 고(苦)라고 생각했을까 의문이었다. 나중에 약간의 검색을 해 보니 역시 그릇된 해석, 혹은 쉽게 가는 지름길이 여기에도 있었다. 어디 종교서적 뿐이랴…번역된 투자서를 읽을 때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번역은 정말 중요하다.

내가 틈틈이 보기 위해서 블로그에 인용해 둔다. 물론 읽기만 했을 뿐 아직 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행하지도 못하고 있다.

“괴로움이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마치 불교의 존재 자체를 결정해 주는 듯한 ‘착각’은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의 그릇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사성제는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파타나에서 서로 옛동료였던 다섯 명의 고행자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이라는 점 때문에 불교의 인간관, 세계관으로까지 이해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전에 나와 있듯이 아주 간략하게 설(說)해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초기의 불전들은 사성제에 대해 상세한 부연 설명과 더불어 다양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첫번째의 고귀한 진리인 고(苦:Dukha)성제는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로 번역된다. 그래서 “불교에 의하면 인생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까닭이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안이한 번역과 수박겉핥기식의 해석이 저질러놓은 결과이다.
불교가 고통의 종교로 인정받는 것은 현실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가 합리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과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필리어인 듀카(산스크리트어는 du-hkha)란 말은, ‘행복’, ‘안락’, ‘평안’을 뜻하는 수카(樂, su-kha)란 말과는 반대로, ‘고뇌’, ‘고통’, ‘슬픔’, ‘비극’을 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타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사성제의 첫번째 진리인 ‘고’성제는 더욱 갚은 철학적 의미와 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고’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고로서 ‘괴로움’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불완전’, ‘무장’, ‘공(空)’, ‘무아(無我)’와 같은 더욱 깊은 뜻을 함께 포함한다. 불타가 “괴롭다”고 말할 때, 그가 인생에서의 행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출가승은 물론이고 재가 신도에게까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불타의 가르침을 싣고 있는 다섯 개의 팔리어 경전 가운데 하나인 ‘증일아함경’에는 가정생활의 행복과 속세를 떠난 운둔자의 행복, 감각적 쾌락의 행복과 자제에서 오는 행복, 애착에서 오는 행복과 욕심을 떠남에서 오는 행복, 육체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행복 등과 같은 행복의 종류들이 열거되고 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듀카에 포함된다. 높은 명상적 단계에서 얻어지는 선정(禮定)의 매우 순수한 정신적 상태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괴로움의 모든 감정을 벗어난 순수한 마음의 성성적적(惺惺寂寂 : 명철하고 고요함)한 상태와 같은, 괴로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이러한 매우 높은 정신적 상태조차도 듀카에 포함된다.

‘중아함경’에서도 불타가 이러한 선정 상태의 정신적 행복에 관해서 찬양한 뒤에 그것들은 “무심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괴롭다’를 듀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고’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이렇게 내릴 수 있다. 곧,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괴로움이란 뜻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라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을 뜻한다. ‘고’의 개념은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으니, 곧, 고고성(苦苦性:일반적인 괴로움), 괴고성(壞苦性:변화에 의한 괴로움), 행고성(行苦性:조건지어진 괴로움)이 그것들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워하는 사람이나 좋지 않은 조건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조건 이별하고, 바라는 것은 얻지 못하고, 슬퍼하고, 비탄에 잠기고, 곤궁에 처하는 삶의 모든 괴로움 등이 고의 ‘고고성’으로 인정되는 것들이다.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변할 때 고통, 괴로움, 불행을 낳는다. 이런 파란만장한 변화가 고의 ‘괴고성’이다. 이 두 가지 고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인생 고뇌의 단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이해하기도 쉽고, 그런 까닭에 고성제의 진리도 이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적 고의 실체는 ‘행고성’에 있다. 고성제의 철학적 측면이랄 수 있는 것으로서 ‘존재’, ‘개체’ 또는 나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분석적 설명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 개체, 나로 불려지는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불타는 “간단히 말해서 이 오온에의 집착이 바로 고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서 불타는 명백하게 “비구여 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의 집착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는 오온과 다르지 않다. 오온 그 자체가 바로 고이다. 소위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에의 개념을 알게 되면 고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대상이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의식이 물질의 반대 개념인 ‘정신’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타가 말하는 의식이란 “그것이 생겨나게 된 조건에 따라서 이름지어진다”고 함축적으로 대변할 수 있다.

주석(註釋)의 대가인 부다고사(Buddhaghosa)는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을 함께 생각하면, 불타가 말한 “고를 본 사람은 고의 원인과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것을 본다”라는 고성제의 진리를 이해하기가 좀더 쉬워진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불교도들을 우울하고 슬픈 삶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불교도는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공포나 탐욕이 없는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때문에, 변화나 하지 않은 재난에 대하여 흥분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제나 평온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사실 불타도 우울하거나 고뇌에 찬 음산한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미소짓는 사람(微笑先導)’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대로 보고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은 탐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은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집기(集起)되는 것이다. 그리고 느낌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나며,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12연기(緣起)가 형성된다.”

– 고(苦), 한계지어진 삶의 속성, 월간 해인 61호, 1987

“불타는 ‘정신적 의도’가 업이라고 하고 있다. “정신적 의도의 자양분인 의사식을 이해하면 탐욕의 세 가지 형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불타의 말에서 ‘탐욕’, ‘의도’, ‘정신적 의도’와 ‘업’이란 용어는 모두 같은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있으려고 하고, 존재하려 하고, 존속하려 하고, 더욱 크게 되려고 하고, 더욱 많아지려 하는 탐욕과 의지를 가리킨다. 이것이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여기에 불타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있다. 고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고 그 차체 안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한 고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고 그 차체 안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명심해야 한다…나라고 불려지는 오온의 조건지어진 한계와 무상성 그리고 무명에서 비롯된 잘못된 집착에서 오는 중생의 삶, 그것이 바로 고(苦)이다. 그속에 즐거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한계와 조건이 있는 불완전한 것이며, 그래서 무상함이라는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No man ever steps in the same river twice, for it’s not the same river and he’s not the same man.” – Heraclitus

빅쇼트 주인공 마이클 버리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를 재밌게 봤었다. 빅쇼트 주인공 마이클 버리는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엊그제 알리바바에 관한 글을 하나 쓰면서 마이클 버리 포트폴리오를 얘기하다보니 또 아주 오래전에 메모해 놓은 글이 생각이 나서 읽어 보고, 시간많은 개천절에 또 이렇게 블로그에 들어와 생각을 끄적인다. 나이들어 취미가 블로깅이 될 판..^^

영화 빅쇼트

마이클 버리는 1971년생 의사 출신으로 미국의 주식 토론 사이트 실리콘 인베스트의 유명 필자였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했지만 다른 투자자와 자신의 투자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는 걸 싫어했다. 토론 하다보면 아이디어의 수호자가 되어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싸보이면 숏을 치고 싸보이면 롱을 하는 전형적인 롱숏 플레이어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벤저민 그레이엄과 워런 버핏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실제 투자에서 가치투자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알리바바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괜찮은 회사가 악재로 인해 주가가 하락하는 걸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한다. 기업에 대한 철저한 조사 분석을 통해 괜찮은 회사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버려진 인기없는 주식을 선호한다. DCF를 해보면 기업의 가치 대부분은 지금부터 10년까지가 아니라 10년 이후부터 망할 때까지의 가치가 결정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3년 정도의 시간은 기업의 전체 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 이하로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특정 악재로 가치에 비해 가격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떨어진다면 마이클 버리는 안전 마진이 있는 한, 전혀 두려워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신문방송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의 투자 타임라인은 대체로 3~5년이지만 단기간 50%이상 급등하면 매도하기도 한다. 벤저민 그레이엄도 그렇게 했다..^^

지금은 중단된 MSN money central stock screener를 통해 저렴한 주식들을 스크리닝했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시가총액 규모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기관들의 관심이 적은 중소형주를 선호했으며 벤저민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NCAV전략도 사용하고 EV/FCF, EV/EBIDTA가 절대적으로 낮은 종목들을 선별해서 투자하기도 한다. 특히 부채가 적거나 거의 없는 기업을 선호하고 버핏처럼 자산을 재조정한 PBR을 고려하고 PER와 ROE는 무시한다. 이렇게 보면 가치투자 1.0과 가치투자 2.0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내가 책을 쓰면서 이야기했던 전략들이다.

포트폴리오에 12~18개 기업 정도가 들어있을 때 편안하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현금 비중을 의식적으로 따로 가져가지는 않고 대체로 모두 투자하려고 한다. 포트폴리오 회전률은 보통 50% 수준이고 52주 최저가의 10~15% 범위 내로 들어왔을 때 매수하는걸 선호하고 가치투자 1.0으로 매수했다면 52주 최저가를 깨고 내려가면 바로 손절한다.

“In the end, investing is neither science nor art — it is a scientific art.”

“결국 투자는 과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닙니다. 두 가지가 혼합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이 훌륭한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의 주요 도구는 리서치입니다. 투자하기 전에 기업의 가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을 만났을 때 저는 가치 투자자로 태어났다고 느꼈습니다. 저의 모든 선택 과정은 안전 마진이라는 개념에 기반합니다.”

– 마이클 버리

알리바바에서 언급했지만 현재 그의 포트폴리오 약 45%는 중국관련 주식(알리바바, 바이두, JD)이다. 아마 지금은 비중이 또 달라졌을거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인상적인 장면

주말에 투자 전략 지도를 가지고 놀면서 또 하나 한 일은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을 4회까지 시청했다. 요즘 장안의 화제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나는 항상 이런 것에 늦다. 이거 완전 오징어게임의 요리버전이구만 하는 생각으로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한식대첩 승자 백수저 이영숙님과 장사천재 흑수저 조사장의 대결이었다.

흑백요리사

우둔살을 재료로 한 대결이었는데 작은 놋그릇에 담긴 미소곰탕과 전립투구 위에 차려진 풍성한 샤브샤브가 대조적이었다. 바로 며칠 전, 단순함에 대한 글 하나를 올렸던터라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그림 하나가 있었다. 미소곰탕이름과 비슷하게 미소짓는 그림이다..^^

단순성 지도

요리나 투자나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법을 접목시켜 나가면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그 속에서 앞으로 전진하면서 차차 실수를 피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장사천재 조사장은 위 그래프의 6~8레벨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단계에선 더 많은 지식이 축적될수록 더 많이 시도하고 싶어진다. 이영숙님은 몰라도 9~10레벨에 있지 않을까. 고수는 음식을 깊이 이해하여 몇 가지 고품질 재료와 기술을 활용하여 겉보기에는 절제된 듯하지만 맛은 놀라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10년동안 되게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달려왔다 생각했는데, 참 덜어 냄의 미학을 몰랐다는 걸, 오늘 진짜 너무 크게 깨달았어요.” 대결이 끝난 후 흑수저 조사장의 말이다.

주말에 투자 전략 지도를 가지고 놀면서 흑백요리사를 봤기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서는 요리와 투자에 대한 생각들, 복잡함과 단순함에 대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뒤엉켰다. 투자 전략 지도에서 더 빼야 할 것은 없는가? 이 지도만 보면 좋은지 나쁜지를 90% 이상 정확도로 가려낼 수 있는가? 그리고 흑백요리사 같은 프로그램을 투자분석에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재야 고수들과 업계 전문가들의 기업분석 대결같은..ㅋ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입니다. 무언가를 단순하게 만들고, 근본적인 과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우아한 해결책을 내놓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미니멀리즘이나 잡동사니의 부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잡성의 깊이를 파헤치는 것을 포함합니다. 진정으로 단순해지려면 정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필수적이지 않은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본질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 스티브 잡스

돌아가신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거금을 들여 잭 니클라우스와 함께 라운딩하면서 지도를 바랬는데 라운딩 중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 회장이 조언을 부탁했더니 잭 니클라우스는 딱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Do not head up.” 머리를 들지 마세요. 버핏에게 물으면 “절대로 돈을 잃지 마세요.”라고 할 것이다. 멍거는 아마도 “나쁜 기업은 멀리 하세요.”라고 하지 않을까?!

끝으로 넷플릭스 투자 전략 지도. 요리가 결국 좋은가, 맛있는가로 귀결된다면 투자는 결국 좋은가, 싼가로 귀결된다. 넷플릭스는 좋은가? 그리고 싼가?

넷틀릭스 투자 전략 지도

넷플릭스의 가장 큰 경쟁자는 누굴까? 디즈니, 아마존, 웨이브, 쿠팡플레이와 티빙 같은 동종업체일까, 아니면 유튜브일까?

TV 점유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