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팔 PYPL 10초 내재가치 계산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 중 하나에서 페이팔 PYPL 에 대한 개요가 정리되어 있었다. 기존 가치투자자들이 관심두지 않았던 성장주 투자로 영역을 넓힌 빌 밀러 펀드에서 페이팔 PYPL 에 대해서 긍정적인 뷰를 보였다. 10초 밖에 걸리지 않으니 부담없이 내재가치 계산기에 넣어 보기로 하고 그 전에 먼저 야후파이낸스로 가서 최근 5년 주가 흐름부터 살폈다. 5년 동안 수익률 -33%에 현재 PER 17 수준이다. S&P500 평균보다 낮은 수준.

페이팔 주가

빌 밀러는 (그럴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두 번재 책을 쓴다면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정도로 의미가 큰 사람이자 아마존의 진가를 미리 알아 채고 초기부터 아마존에 투자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가치투자의 지평을 넓힌 구루다. 물론 그가 아마존의 클라우드 사업까지 미리 내다보고 투자하진 않았다.

최근에 초기 아마존에 투자한 한 투자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진행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그럼 그 베조스의 피치를 듣고 앉아 있는 동안 어땠는지 말해보세요.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그 순간 무엇을 보셨나요?”

“케빈 컴튼: 세계를 제패한 기업가. 누군가가 그것이 서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그는 그 분야에서 훌륭할 것이지만, 그는 그저 세계를 지배하는 기업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동기를 부여하고, 카리스마가 있고, 통찰력이 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엄청나고,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역할에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가치 투자는 어떤 종목이 비싸 보인다고 해서 그 종목이 최고 가치라고 가정하거나, 주가가 하락하고 낮은 배수로 거래된다고 해서 그 종목이 싸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빌 밀러

이런 사람이 좋게 보는 기업이라면 좀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자세히 살펴 본다고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먼저 분기별 실적을 살펴 보면, 차차 낮아지고 있던 매출총이익률도 40% 선에서 바닥을 다지고 반등할 모양새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완만하지만 우상향하고 있고 FCF도 좋다.

페이팔 분기별 실적

숫자 그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페이팔 예상 성장률

전문가들의 향후 미래 성장 예상도 19%로 높은 편인데 주가는 생각보다 낮다. 주식 시장은 생각보다 영리하다. 시장은 성장하지만 그에 따라 경쟁이 더욱 치열해 질 수도 있다. 페이팔에는 결제 플랫폼/관리 분야에서 많은 경쟁업체(Skrill, Square, Stripe, Venmo, Payoneer 등)가 있는데 예상 시장 점유율을 보면 2024년 기준 37.23%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한 Stripe가 현재 PayPal의 가장 큰 경쟁자다.

페이팔 시장점유율

흔히 볼 수 있는 점유율 그림은 시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페이팔 자회사 또는 “결제 솔루션”에는 Venmo, Xoom, Paidy, Honey 등이 있으며, 디지털 지갑 Zettle은 POS 거래용이다. 결제에 대한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애플페이 POS

PayPal의 시장 점유율은 Apple Pay, Google Pay, Block(NYSE:SQ)을 비롯한 다른 결제 서비스 제공업체와의 경쟁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커머스가 PayPal에서 모바일로 점점 더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Apple Pay가 PayPal의 시장 점유율 하락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모바일 결제에서 편리한 네이버페이나 카카오페이, 그리고 삼성페이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염려가 페이팔 주가에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장점유율 1위다.

미국 소비자 결제수단
페이팔 목표주가

전문가들의 목표주가도 범위 편차는 큰 편이지만 평균은 현재 주가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다. 최근에 홀드에서 바이로 많이 이동했다. 빌 밀러 펀드는 경쟁업체에 비해 약 43% 저평가됐다고 했는데 성장률을 약간 보수적으로 봤는지 몰라도 10초 내재가치 계산기는 다음과 같았다.

페이팔 내재가치

관련 기사를 검색하는 중 페이팔(PYPL)은 최근 Zacks.com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주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페이팔은 Zacks 스타일 점수 시스템의 일부인 Zacks 가치 스타일 점수 측면에서 A~F등급 중 B등급을 받았는데, 이는 동종업체에 비해 할인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유야 어쨌든 성장하고 있고 전망이 좋으며 사람들이 흥분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회사를 매입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빌 밀러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났는가. 그것을 실재론(또는 합리론)이라고 하든 경험론이라고 하든(합리론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고, 경험론은 로크로부터 버클리 데이비드흄으로 이어진다) 상관없이 세상은 소리가 났다는 사람과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사람으로 갈린다. 그리고 이 철학적 화두는 후에 양자역학으로도 이어지고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이어진다.

데모크리토스는 빛은 입자이라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빛은 파동이라고 주장했다. 17세기 과학자 뉴턴은 빛은 수많은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입자설을 주장했고 네덜란드의 과학자 호이겐스는 빛이 공기 중의 어떤 특별한 매질을 통해 진행하는 파동이라고 주장했다. 빛이 파동일까, 입자일까 하는 문제는 이후 무려 150년 동안이나 논란이 되다가 19세기에 토머스 영이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1801년)을 통해 빛의 파동설을 지지해서 일단락되는 듯하다가 20세기에 아인슈타인이 ‘빛은 입자다’라는 전제를 통해 광전효과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1905)하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이후 사람들은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 모두를 가졌다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여 원자보다 작은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을 만들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연 또는 확률, 곧 예측 불가능성이 이 우주를 지배하게 된다. 즉, 양자 이론은 비록 우리가 우주의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의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오직 확률적 예측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그렇다면 저기 있는 달이 내가 보지 않는다면 없다는 것인가?” 라고 반박하며 그 유명한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1가 나왔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포스터

“18세기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조지 버클리(주교였다)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고 말했는데, 뒤집으면 ‘지각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는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닐스 보어는 “어떠한 사물도 관측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특성이란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포스터2

“아인슈타인은 가까운 젊은 후배 물리학자 에이브러햄 파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정말 자기가 달을 쳐다봤기 때문에 달이 거기 존재한다고 믿는가?” 파이스의 답. “나는 아인슈타인이 왜 그토록 과거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현대 물리학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식 인과율을 끝까지 고집했다.” 케인스가 말했듯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옛 것에서 빠져 나오기가 훨씬 더 어렵다.

관찰자가 없는 상태에서 빛은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응시하는 순간 입자로 바뀐다.2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가도 누군가 소리를 듣는(찾는) 순간 소리가 났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하고 못들은 혹은 없는 소리를 들으려 할 수도 있다. 그 목적이 돈(집 값)이 됐든 귀찮음이 됐든 상관없이 누군가는 소리를 아예 없었던 양 못들은 척 할거고 누군가는 또 들은 척 할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아니라 소리를 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내가 소리를 냈는 데 아무도 못들은 척 하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무심코 돌을 던지는 사람의 입장. “처음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이 하나의 의견이 되고 나중에는 상식이 된다. 사회가 거기에 이르면 희망을 찾기 어렵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나 벌거벗은 임금님은 역사책이나 동화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처럼 재밌고 즐겁게 본 넷플릭스 드라마였다.

  1. 닐스 보어는 “신에게 참견하지 말라(Einstein, stop telling God what to do)”고 했다. ↩︎
  2. 양자역학계에서 표준으로 채택된 이론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현실에 대한 양자 역학의 설명이 피상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점에 회의감을 갖고 아인슈타인과의 토론 끝에 현재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불리는 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이 실험은 원래 양자 역학의 불완전한 면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양자 역학을 묘사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고 실험이 되어버렸다)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문을 여는 순간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운데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의 상태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었으나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이것을 간단히 “파동 함수가 붕괴된다”고 표현한다. 파동 함수가 수축한다, 파동의 붕괴 또는 수축으로 표현해도 ‘관측 시 하나의 값으로 확정된다’는 의미는 같다. 요즘은 코펜하겐 해석을 뛰어 넘어 멀티유니버스로 불리기도 하는 ‘다세계 해석’이 있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살아있는 세계와 죽어있는 세계가 모두 존재하며 관측하는 순간 어떤 한쪽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

퍼펙트 데이즈, 평범한 하루

여름 휴가의 시작을 “퍼펙트 데이즈”와 함께 했고 휴가의 끝을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와 함께 했다.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요즘은 영상도 활자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제대로 각잡고 영화를 본 지도 오래 됐고 휴가를 다녀온 지도 벌써 까마득하다. 예전같으면 바로바로 여행기고 독후감이고 영화감상문을 SNS에 올렸겠지만 이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그냥 느꼈으면 됐지 굳이 남겨야 하나…생각이 앞선다.

페펙트 데이즈 영화포스터

그래도 이 영화는 보고 나서도 잔상이 오래 남았기에 이렇게라도 흔적을 남긴다. ‘괴물’을 볼까 ‘퍼펙트 데이즈’를 볼까 아주 짧게 고민하다 이 영화를 골랐는데 지나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괴물’을 챙겨 봤는데…생각보단 별로였다. 퍼펙트 데이즈는 생각보다 좋았고.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 도쿄 시내 화장실 청소부의 반복된 하루를 켜켜이 쌓아서 보여준다. 가족과도 거리를 두고 사람들과도 거리를 둔 채, 자신의 하루를 꾹꾹 채워 평범하지만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 간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친밀감, 그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 내가 노년에 꿈꾸는 삶이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을 볼 줄 아는 삶. 미래를 위해 미루지 않고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 찰나에 깨어 있는 삶.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맥주 한 잔, 지인들과의 스몰 토크…블로그에 글 하나 남길 수 있는 여유 같은 것. 그러고 보니 블로그도 유튜브나 틱톡같은 숏폼에 밀려 이젠 옛스런 느낌마저 든다.

숏폼에 밀린 블로그처럼 핸드폰 같은 디지털카메라에 밀린 필름카메라나 음원에 밀린 카세트테이프 같은 옛 것들, 아날로그 감성이 영화 곳곳에 묻어나서도 재밌었지만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음악도 귀에 익은 옛 것들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 잠들기 전 영화 포스터처럼 머리맡에 놓인 작은 등을 켜고 주말마다 들르는 헌책방에서 산 책을 읽는다. 윌리엄 포크너 책(야생 종려나무)을 읽기에 나중에 검색도 해봤었다. 아마도 빔 벤더스 감독에게 영감을 준 책이라 생각했다.

헌 책방 주인은 주인공이 골라 든 책에 대해 이것저것 아는 체를 하며 덧붙인다. “같은 단어라도 이 작가가 사용하면 느낌이 완전 다르다”같은 방식으로. 주인공이 화장실의 모든 부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책방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그런 주인이 카운터를 지키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헌 책방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