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풍경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여름 더위에 중단했던 산책을 하고 있다. 40분 남짓 천천히 근처 공원을 걷는다. 역시 예전엔 항상 이어폰을 챙겨서 뭔가를 들으면서 걸었는데 이젠 점점 그냥 걷는다. 걸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는 걸 그냥 가만히 놔두는 식이다. 걸으면서 명상한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럴싸한 명상이 아니라 그냥 떠오르는 상념에 가만히 맡겨 두고 지켜보는.

너구리

산책길에 3일 연속으로 너구리를 만났다. 엊그제는 무려 3마리를 한꺼번에 만났는데 오늘은 한 마리랑 길 한복판에서 조우했다. 익숙한듯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 게 신기해서 이번엔 핸폰으로 찍었다. “가까이 접근하면 상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발견 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모른 척 지나가달라”는 안내를 본 적도 있어서 그냥 조용히 지나쳤다. 너희들도 먹을 게 없어 사람이 있는 곳까지 접근한거니..

걷다 보면 배드민턴 장을 지나치는데 그 시간에 항상 배드민턴을 치는 부부가 있다. 랠리가 세 번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둘 다 공격적이다. 족구장과 함께여서 네트가 낮은 편인데 거길 서로 내리 꽂는다. 보통 둘 중 실력좋은 사람은 상대가 잘 치도록 좋은 방향으로 건네기 마련인데 이 부부는 서로 인정사정 없다. 기회만 오면 서로 강스매싱이다. 이러니 처음부터 상대에게 서브를 잘 줄리가 없다. 한번, 아니면 세번째 끝. 다시 한번 아니면 세번째 끝. 게임에 내기를 하고 치던가 아니면 부부싸움 대신에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옆 흙길로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맨발 걷기가 유행은 유행인가 보다. 또 무리지어 달리기를 함께 하는 그룹도 보인다.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걷다보면 마주치는 반환점에 있는 풋살장에는 외국인들이 가끔 경기를 한다. 올 여름에 운동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고들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경기에 몰입한다.

산책길 마지막은 상가를 지난다. 가끔씩 커피를 한 잔 마시기도 하는데 얼마전에는 요런 녀석을 만났다. 너구리만큼이나 신기했는데 이녀석 횡단보도도 신호보고 건넌다. 내 주위 세상은 참 빨리도 변하고 있다.

요기요 배달로봇

근처 산책길 루트가 몇 개 있는데 이 루트가 내가 애용하는 루트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항상 변하는 것 같지만 또 어찌 보면 항상 그대로다. 사람들만 변해가는 것도 같다.

버스타고 병문안 다녀오는 길

병문안 다녀올 일이 있어서 1시간 정도 길게 버스를 탔다. 보통 이럴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듣고 싶어 저장해 놓은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 날은 왠지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저 멍하니 차창밖을 바라 보며 하릴없이 보내고 싶었다. 승객들은 적당히 자리에 앉았고 서있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 버스는 출발이 더뎠는데 전기 버스는 승용차보다 더 날렵해졌다. 악셀을 밟으면 바로바로 반응하기때문에 버스 기사들이 예전처럼 급출발 급정거했다가는 난리나겠단 생각을 잠깐 했다.

그 때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빈 자리가 많이 있었지만 넓직한 장애인석 주변에 몰려 손잡이를 잡고 매달리며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버스 속 소리를 독점했다. 조용하던 버스가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기사분이 마이크로 학생들을 제지하며 위험하니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아이들이 버스 제일 뒷자리로 약속한듯 우루루 몰려 갔다. 두 칸 앞자리에 앉아 있기도 했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크기도 해서 본의 아니게 학생들의 대화를 그대로 엿듣게 됐다. 곧이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들이 아이들의 조막만한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냥 욕설은 욕설이 아니었고 한 두 아이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심한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

버스 안

이어폰을 꼽아 욕설이 내 귀로 들어오는 걸 차단했더니 조금 있다가 초등학생들이 내리고 이번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 둘이 역시 그 뒷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어폰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려오는 말을 들으니 역시나 똑같았다. 한 단어 지나가면 욕이고 한 문장 사이 수 십번의 욕이 들어 있다. 그냥 욕설이 입에 붙어 있어 욕이 없으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다. 놀라운 것은 잠깐 가족과 전화 통화할 때는 공손한 말투와 억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병문안 다녀오며 꼭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야만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 안에도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정작 나도 환자인데 나만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블로그 지난 달 결산

문득 블로그 지난 달 결산을 해봤다. 지나보니 이번 8월엔 8일을 뺀 23일 글을 올렸다. 1년 전 이맘때쯤 마음먹고 연속으로 30일쯤 글을 쓴 이후 가장 많은 글을 올린 달이 됐다. 주제는 아무래도 신변잡기보단 투자에 대한 생각들을 좀 집중적으로 썼던 것 같은데 반응은 별로 시원찮다. 인생에도 주기가 있듯 블로그도 열심히 쓰다가 또 소홀해 졌다가 하면서 반복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한다. 1년 전에도 열심히 쓰다가 손을 놨고 이번에도 또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에도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다.

8월 글 쓴 날

블로그 사이드바에 이 달력을 배치한 이유는 파란색으로 채울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파란 칸 없이 흰색 칸으로만 채워진 달력…유통기한이 지나 주인이 들어오지 않는 블로그는 썰렁하다. 사람이 살지않는 빈 집처럼 잡초와 거미줄이 제집인양 자리잡는다. 이 블로그도 한 동안 거미줄이 쳐진 그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인터넷 한 귀퉁이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처럼 오랜 시간 지내왔다. 이제 겨우 하루 20명 정도 드나드는 곳이 되었지만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고즈넉하니 좋기도 하고 적적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역시 오락가락이다. 시끌벅적한 SNS보다는 훨씬 낫다..ㅋ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첫 번째 독자는 나다. 내가 적어 놓은 내 글을 읽기 위해 내 블로그에 들어 오게 된다. 과거에 올려 놓은 글을 찬찬히 다시 읽다 보면 내가 이런 글도 남겼었나 싶은 글들도 있다. 벌써 치매가 올 나이도 아닌데 신기할 때가 많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그 순간의 생생한 느낌이나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 그것보다 더 좋은 블로그 존재 이유는 없다. 특히 어느 순간 특정 기업의 사진을 찍어 놓는 용도로는 딱이다. 투자자가 블로그를 하면 좋은 이유 중 하나다. 워드프레스는 비공개 글로 나만 볼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목적없이는 힘들 것 같은데 꼭 돈이 목적일 필요는 없을테니 뭔가 다른 목적을 찾아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목적이 이끄는 삶. 그러고보니 돈이 목적이어야 투자에서 돈을 많이 벌텐데 난 그렇지도 않고, 블로그도 대부분 돈을 목적으로 열심히 운영하는데 난 또 그렇지도 않다. 버핏의 투자 제 1원칙은 “돈을 최대한 많이 벌어라”가 아니라 “절대로 돈을 잃지 마라”다. 블로그 운영 원칙 역시 “어떤 방법으로든 최대한 유입 고객을 늘려라”가 아니라 “한번 블로그에 들어온 고객을 절대로 잃지 마라”가 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매력적인 글, 독자가 찾아와서 읽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 내겐 여전히 모자란 재능이다.

추가) 매사 꼭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만도 아니다. 뭔가를 일단 꾸준히 하다 보면 처음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목적을 찾는 경우도 있다. 삶이 이끄는 목적쯤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