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에 필요한 에너지

좋은 투자의 조건을 단순함이라고 했는데, 경험상 단순함으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소수의 천재들은 보는 즉시 단 한번에 단순함으로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둔재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많은 길을 굽이굽이 돌고 나서 보면 그제서야 단순함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스티브 잡스가 1997년에 애플에 복귀했을 당시,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으며 이를 되살리기 위한 주요 이니셔티브 중 하나는 애플의 제품 라인을 단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잡스는 회사의 제품 로드맵에 대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잡스는 분명히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만해… 미친 짓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화이트보드로 걸어가서 2×2 행렬을 그려서 Apple의 새로운 전략을 설명했는데, 그것은 4가지 제품에만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매트릭스

처음 10초 내재가치 계산기를 만들었을 때, 머릿속 디자인은 정말 단순했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버핏과 멍거의 머릿속을 기본 컨셉(이게 제일 어려운 일)으로 조건 한 두 개만 넣으면 내재가치와 가격이 나오는 구조였다. 이미 시나리오별 현금흐름할인법(DCF)를 하는 나만의 복잡한 분석틀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굳이 각잡고 분석으로 들어가기 전, 가볍게 10초 만에 계산할 수 있으면서 DCF와 비교해서 오차가 적은 계산기면 충분했다. 싼지 비싼지를 바로 알 수 있는 계산기.

그럼 지금 내재가치 계산기는 어떤 상태일까. 열역학 제2법칙 처럼 엔트로피(무질서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증가하기 마련이다. 싼가 비싼가에 좋은가 나쁜가 까지 보고 싶어지면서 단순한 디자인에서 보고 싶은 숫자들을 하나 둘 추가하다보니 결국은 기존 복잡한 분석틀에 거의 가까운 모델이 되어 버렸다. 이럴거면 굳이 10초 계산기를 만들 이유가…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시 중요도가 낮은 정보들을 제거해 나갔다. 재밌는 건, 추가할 때보다 줄여 나갈 때 에너지가 훨씬 더 많이 소모됐다.

이전에 주식 투자는 어렵다라는 글에서 장기 투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투자를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을 높이는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불행히도, 장기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빛의 속도로 정보가 유통되고 순식간에 매수매도를 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된 지금, 장기적으로 사고하고 장기적으로 투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졌다. 투자는 지능의 제일 높은 수준인 단순함과 인내를 통한 장기투자가 결합되어야 한다. 둘 모두 일반인이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특성이다. 그레이엄과 멍거와 버핏은 단순함에 이른 사람들이자 지능보다 기질의 중요성을 깨친 사람들이다.

“저는 항상 하나의 인사이트를 찾고 있습니다. 사업을 소유하는 것에 찬성하는 논거는 한 줄짜리 9포인트 글꼴로 몇 페이지에 걸쳐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지금까지 투자한 모든 투자의 결과는 명함 뒷면에 여백을 두고 모두 적을 수 있습니다.”
– 피터 키프, Rockbridge capital management

블로그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단순함을 목표로 시작했지만 이것 저것 기능이나 플러그인이 추가되기 시작하면 곧 단순함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꼭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제외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물론 블로그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면서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투자나 블로그나 비슷한 점이 많다.

좋은 투자의 조건, 단순함 그리고 명확함

심플한 것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디자인이 심플하고 단순한 걸 좋아한다. 일상 속 루틴도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걸 선호하는 편이다. 뭔가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뭔가를 깊이 이해하고 나면 군더더기를 걷어 낸 핵심만 남게 된다는 주의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무수히 많은 체크리스트를 만들 게 되지만 시간과 경험이 늘어날수록 체크리스트는 줄어든다. 만약 충분히 줄어들지 않았다면 아직 충분히 깊이 들어가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좋은 투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투자고민

내게 좋은 투자의 조건,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단순함이다. 투자아이디어가 단순하고 명확해야 한다. 단 한 줄로 투자이유를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투자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해 엑셀이 필요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투자대상에 대해 잘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단순해진다.

그래서 능력 범위(circle of competence)가 중요하다. 자신이 가진 능력 범위의 경계를 스스로 아는 게 중요하고 능력 범위를 넓혀 가는 게 중요하다. 능력 범위의 크기보단 스스로 경계나 한계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능력 범위는 누구나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법은 변호사를 찾고, 아프면 의사를 찾고, 배고프면 요리사를 찾는다. 하지만 투자에서 그렇지 않다. 건설회사에도 투자하고 식품회사에도 투자하고 헬스관련 기업에도 2차전지, 반도체, 생명공학이나 제약 기업에도 투자에 거침이 없다.

“좋은 아이디어에는 명확성이 필요합니다. 왜 무언가가 좋은 사업인지, 어떻게 그리고 왜 저렴한지, 왜 일시적으로 저렴한지, 그리고 평소라면 훨씬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어야 하는지 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워런 버핏이 말했듯이, 당신은 스프레드시트의 40페이지에 앉아서 사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당신이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아직 당신의 머릿속에서 충분히 명확하지 않거나, 생각만큼 인상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식을 소유하는 이유를 몇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힘든 일은 여러분을 그 지점으로 이끄는 가정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일을 했다면 실제 아이디어는 매우 단순해집니다. 우리가 벌어들인 돈 중 가장 많은 것은 우리가 한 방식으로 보면 꽤 명백한 아이디어에서 나왔습니다.”

– 조엘 그린블라트

아인슈타인도 이런 단순함의 힘을 일찌감치 인식했다. 그는 지능의 5가지 수준이 “똑똑함, 지성적, 훌륭함, 천재성, 단순함”이라고 언급하면서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지능이라고 말했다. 투자할 때, 한 줄로 설명하지 못하고 엑셀을 실행해야 한다면 그것은 패스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경고 신호다.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능력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는 경고 신호다.

아인슈타인

그래서 내재가치 계산은 마지막 단계다. 밸류에이션 계산으로 들어가기 전 전제조건이 있다. 버핏은 눈 앞에 있는 기업이 절대적으로 확실해야 한다고 했다. 경영진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기업이 벌어들이는 현금흐름이 향후 십 년 이상 확실하게 들어온다는 절대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10년 후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씨즈캔디는 팔릴거고 10년 후에도 코카콜라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선택될 것이고 10년 후에도 사람들은 질레트 면도기를 사용할 것이다. 만일 10년 뒤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데 베팅하는 사람이 있다면 버핏은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그럴것이라는 데 베팅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위에 있는 분야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요. 나는 사람들이 나보다 유리한 게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명하고 나는 멍청한 게임에서는 플레이하지 않습니다. 나는 현명하고 남들은 멍청한 게임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잘 작동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멍청한 경쟁자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들은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줍니다.”

“당신은 당신의 적성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적성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게임을 한다면, 당신은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예측만큼이나 확실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우위가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역량 범위 내에서 플레이해야 합니다.”

– 찰리 멍거

멍거에게도 이 점은 명확했다. 자신이 반대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으려면 적어도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는 가장 똑똑한 사람과도 토론해서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릭 게린은 멍거를 처음 만나자마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멍거의 거래상대자가 아니라 멍거쪽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오늘도 당신의 컴퓨터나 핸드폰 화면 건너편에는 당신에게 주식을 매도하거나 매수하려는 거래 상대방이 있다. 적어도 그 사람보다 당신이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가? 당신이 매수하거나 매도하려는 회사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10년 동안 거래소 문이 닫히고 증권사 문이 닫혀 매수매도를 하지 못하더라도 아무런 동요가 없을 수 있겠는가? 10년 후에도 그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당신은 그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가? 인생에 단 20번만 거래가 가능하다면 지금 그 한 번을 사용하겠는가? 매수 이유를 단 한 줄로 설명할 수 있는가?

“결국, 거기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만큼 그것을 처리할 능력이 없어서 특정 종류의 투자를 남겨두어야 한다면,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기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 찰리 멍거

S&P500 지수를 이길 자신이 있는가

패시브 투자자가 아니라 직접 주식을 골라 투자하는 액티브 투자자라면 인덱스인 S&P500 지수를 이길 자신이 있어야 한다. 만일 S&P500을 이길 자신이 없다면 직접 투자는 깨끗하게 포기하고 인덱스 같은 간접 투자부터 해야 한다. 뭔가를 고르겠다는 것은 최소한 뭐가 좋고 나쁜지는 안다는 걸 전제한 행위기 때문이다. 좋은 기업은 어떤 기업인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멍거나 버핏이 그들의 후계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엿보면 최소한 S&P500에 속한 기업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부가 끝난 사람들 사이 대화다. 500개 기업의 가격 수준인 PER PBR 같은 알려진 숫자들 말고 500개 기업의 10년 매출성장률은 어느 정도일까? 500개 중에서 10년 동안 연평균 10% 이상 매출이 성장한 기업이 몇 개 정도나 될까? 우리나라 코스피 기업 중에서 10년 동안 연평균 10% 이상 매출이 성장한 기업은 또 몇 개나 될까?

S&P500 5년 수익률

오늘자로 최근 5년동안 S&P500 연평균 수익률을 보니 13.48%다. 배당수익률 약 1.5%를 더하면 대략 연평균 15% 수익이다. 만약 직접 투자하고 있는 자신의 최근 5년 수익률이 연평균 15% 이하라면 인덱스투자로 바꾸라고 냉철하게 권하고 싶다. 5년 동안 15% 수익이면 투자금은 2배가 된다. 10년이면 4배가 되는 속도고 50년이면 1000배가 되는 속도다. 10년 동안 15% 수익을 꾸준히 낼 수 있는 사람은 전문가를 포함해도 거의 없다. 앞으로는 이런 수익을 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 경고한 멍거 옹이 생각난다.

젊은 시절 버핏은 최소한 인덱스를 10%p 이길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고 난 후 투자조합을 만들고 직접 투자에 임했다. 물론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나중에는 5%p로 목표를 낮춰 잡기는 했지만, 버크셔를 인수하고 거의 60년이 넘는 기간동안 버핏은 인덱스를 10%p 가까이 이겼다. 버핏이 어떻게 인덱스를 이겼는지 하나하나 공부하고 난 후, 난 스스로 노력한다해서 버핏같은 투자자가 결코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버핏은 커녕 인덱스를 이기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 코스피 최근 5년 동안 연평균 수익률을 보니 5.35%가 나온다. 작년 배당수익률이 대략 2% 내외라고 하면 최근 5년 동안 연평균 7.3% 수익보나 낮은 사람들은 그냥 인덱스에 투자하는 게 낫다. 이렇게 보니 최근 5년 동안 미국 S&P500 수익률이 우리 코스피보다 거의 2배 높은 수익률이다. 물론 과거 실적이 미래를 보장하지 않지만 최근들어 더욱 더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가 줄어들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씁쓸하지만 5년 전부터 미국 주식에도 투자해야 한다고 했던 이유기도 하다.

직접 주식을 고르려면 고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어떤 기업들이 있는지는 스스로 찾고 확인해야 한다. 뭐가 좋은지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액티브 투자를 시도해선 안된다. 이는 국내든 해외든 똑같은 필요조건이다. 그레이엄이 대단한 점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책(현명한 투자자)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접 투자를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한다. 만일 제대로 세 번을 읽었다면 바로 직접투자로 시작하기보단 인덱스 투자로 시작하게 될 것이다.

S&P500에 포함된 500개가 조금 넘는 기업을 일정 기준으로 필터링 했더니 중복해서 나오는 기업들이 몇 개 보인다. 간단하게 살펴 보니 버핏이 지분을 늘려 나가는 옥시덴탈과 같은 석유관련 업종의 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관련 기업들을 모아서 사진찍어 봤다. 이 모아놓은 숫자들 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다.

S&P500 석유 가스 기업

70달러 이하로 내려간 석유가격때문에 업황이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하나씩 돌을 뒤집다보면 거기서 진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없으면 또 다른 돌무더기를 뒤집으면 되고. 이런 일련의 돌을 뒤집고 기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작업들이 재밌어서 누구처럼 탭댄스를 추면서 출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있는가? 매일 사업보고서를 뒤지고 책 속에 파묻혀 매 순간 고민하는 일이 좋아서 일 속으로 파고드는 그런 투자에 미친 투자자와 경쟁해서 이길 자신이 있는가? 최소한 S&P500을 이길 자신이 있는가? 난 없다.

방금 세어 보니 503개 중 121개가 10년 동안 연평균 매출 10% 이상 성장했다. 무려 24%

추가) 크롬에서 제미나이(3.0인듯)를 바로 쓸 수 있다고 해서 속는셈치고 다시 한번 물어봤다. S&P500은 몇 개 기업 묶음이냐고 물었더니 500개라고 답했다. 알려 준 링크로 들어가서 보니 503개라고 하니 뭐라 했을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