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평범한 하루

여름 휴가의 시작을 “퍼펙트 데이즈”와 함께 했고 휴가의 끝을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와 함께 했다.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요즘은 영상도 활자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제대로 각잡고 영화를 본 지도 오래 됐고 휴가를 다녀온 지도 벌써 까마득하다. 예전같으면 바로바로 여행기고 독후감이고 영화감상문을 SNS에 올렸겠지만 이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그냥 느꼈으면 됐지 굳이 남겨야 하나…생각이 앞선다.

페펙트 데이즈 영화포스터

그래도 이 영화는 보고 나서도 잔상이 오래 남았기에 이렇게라도 흔적을 남긴다. ‘괴물’을 볼까 ‘퍼펙트 데이즈’를 볼까 아주 짧게 고민하다 이 영화를 골랐는데 지나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괴물’을 챙겨 봤는데…생각보단 별로였다. 퍼펙트 데이즈는 생각보다 좋았고.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 도쿄 시내 화장실 청소부의 반복된 하루를 켜켜이 쌓아서 보여준다. 가족과도 거리를 두고 사람들과도 거리를 둔 채, 자신의 하루를 꾹꾹 채워 평범하지만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 간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친밀감, 그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 내가 노년에 꿈꾸는 삶이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을 볼 줄 아는 삶. 미래를 위해 미루지 않고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 찰나에 깨어 있는 삶.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맥주 한 잔, 지인들과의 스몰 토크…블로그에 글 하나 남길 수 있는 여유 같은 것. 그러고 보니 블로그도 유튜브나 틱톡같은 숏폼에 밀려 이젠 옛스런 느낌마저 든다.

숏폼에 밀린 블로그처럼 핸드폰 같은 디지털카메라에 밀린 필름카메라나 음원에 밀린 카세트테이프 같은 옛 것들, 아날로그 감성이 영화 곳곳에 묻어나서도 재밌었지만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음악도 귀에 익은 옛 것들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 잠들기 전 영화 포스터처럼 머리맡에 놓인 작은 등을 켜고 주말마다 들르는 헌책방에서 산 책을 읽는다. 윌리엄 포크너 책(야생 종려나무)을 읽기에 나중에 검색도 해봤었다. 아마도 빔 벤더스 감독에게 영감을 준 책이라 생각했다.

헌 책방 주인은 주인공이 골라 든 책에 대해 이것저것 아는 체를 하며 덧붙인다. “같은 단어라도 이 작가가 사용하면 느낌이 완전 다르다”같은 방식으로. 주인공이 화장실의 모든 부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책방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그런 주인이 카운터를 지키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헌 책방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지금이다.

총에 맞으면 맞는 거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총상을 생각하면서 미션을 할 수 없어요. 속도, 기습, 맹렬함이 핵심입니다. 총에 맞으면 맞는 거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알고리즘으로 뜬 “강철부대3” 한 장면이다.

강철부대3

(출처 : 채널A)

예전에 영화 2개, “범죄도시”와 “남한산성”을 동시에 봤던 기억이 있다.
“범죄도시”를 보면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마동석의 액션도, 윤계상의 변신도 아닌 조연배우 진선규의 연기였다. 극중 윤계상의 오른팔 격인 위성락으로 나온다. 윤계상이 연기한 두목 장첸과 마찬가지로 위성락은 두려움없이 막나가는,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연기를 보여준다. 상대가 쇠파이프를 들든, 칼을 들고 목을 겨누든, 혹은 수십명이 에워 싸든 그는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마동석 같은 하드웨어가 탁월한 인물들을 거리에서 마주치면 시대를 달리 태어났다면 장군감인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극중 윤계상이나 진선규 같은 일말의 두려움없는 불굴의 깡을 가진 인물들이 전쟁의 시대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인물들은 평화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몸이든 깡이든 둘 모두 총칼을 든 무관에게 어울리는 기질이라 생각했다.

며칠 뒤 영화 “남한산성(나중에 알았지만 오징어게임을 만든 황동규 감독 작품이다)”을 봤다. 사람들은 주인공인 김상헌과 최명길, 혹은 인조에 집중했겠지만 내눈에는 먼저 봤던 영화 “범죄도시” 때문인지 거기에 나왔던 배우 두 명이 먼저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이 진선규였는데 휘하에 100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 초관으로 나왔다. 무관이 된 그가 위성락과 같은 캐릭터로 나왔다면 꿀잼이었겠지만 “남한산성”에서 그는 당시에 흔하디 흔한 무관 캐릭터로 나왔고 나중엔 무관답지 못한 최후를 맞는다. 또다른 한 명은 용골대로 분한 허성태였는데 이 영화에서는 청의 무장들이 내가 생각했던 전쟁시대 무지막지한 무관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장첸과 위성락도 만주 지방의 조폭들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남한산성”을 보는내내 나를 사로잡은 장면은 첫장면이었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나오는 수만의 군대와 최명길의 조우. 혈혈단신 청의 대군에 홀로 맞서 인조가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는 장면을 잘 표현했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쇠파이프와 칼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위성락이 가지고 있었던 바로 그 불굴의 깡과 두려움없는 용기를 글이나 읽었을 한낱 문관에게서 볼 줄이야.

전쟁의 시대 무관들만 생각하다가 문관들을 잊고 있었다. 어쩌면 몸의 하드웨어만 생각하다가 소프트웨어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한산성”은 내가 잡고 있다가 잠깐 놓치고 있었던 소프트웨어를 다시 되새겨준 영화였다. 그리고 이번에 강철부대 3편을 보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평화의 시대에도 이런 전사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지금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장이 아니라 비지니스 전쟁터에서다. 애플의 스티브잡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알리바바의 마윈, 그리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을 보면 재무제표나 살피고 보고서나 읽으며 회의실에 앉아 있는 점잖은 사장이라기 보단 전쟁터 한복판의 장군에 가깝다. 조지 소로스나 워런 버핏 같은 세계적인 투자자들 역시 전쟁터의 장군들이다. 수 천만불의 투자나 손실에도 결코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

“총에 맞으면 맞는 거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영화 바람

이성한 감독은 전작인 ‘스페어’를 통해 알았다. 스페어란 영화…참 재기발랄하게 만든 기억에 남았던 영화인지라 이 영화 바람도 기대를 갖고 관람. 스페어처럼 우리 음악을 적절하게 배경음악으로 깔고, 당시 주연급이었던 배우 정우씨를 이번 영화에도 주연으로 발탁했다. 액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지만 전작에선 나름 날것 그대로의 멋진 액션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선 액션을 보여 줄 것처럼 해놓고는 액션, 정확히는 싸움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쪽을 선택했다. 폭력적인 자들의 두려움과 어설픔을 노출시키는 전략.

이 영화는 부산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짱구가 성장해가는 성장영화다. 영화 ‘친구’의 고등학교 버전이란 홍보문구를 봤는데 그건 아닌듯하고 폭력을 나름 공들여서 보여준 ‘말죽거리 잔혹사’의 냉정한 현실버전 정도. 정우라는 배우의 특징이기도 한것 같은데 구석구석 유머러스한 부분이 있어 내내 웃음소리가 들린다. 다만 끝부분의 다소 성급했던 변화는 좀 생경스러웠단..

공교롭게도 이 영화의 말미부분을 채우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EBS에서 간만에 본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의 세아들의 ‘아버지’를 만나고 축구팀 인천유나이티드를 다룬 ‘비상’에서 수비수 임중용 선수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또 만났다. 모두 공통적으론 지금의 아버지들과는 조금 다른 옛날의 전형적인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지금 난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 아버지일까?’란 생각이 요즘 특히나 많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