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그레이엄 자서전을 읽고

증권 분석과 현명한 투자자는 오래 전에 읽었지만 벤저민 그레이엄의 자서전은 이제야 읽었다. 그레이엄의 생애에 대해선 토막 토막 대체로 아는 내용이었지만 자서전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들도 몇 있었다. 본인을 율리시스(오디세우스의 로마명), 벤저민 프랭클린,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하나로 합쳐진 인물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과 같은,

율리시스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이긴 호쾌한 승리를 좋아했다. 율리시스의 성격이나 운명이 그레이엄과는 완전히 달라서 그 다르다는 사실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율리시스의 허물과 미덕이 자신에게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고 썼다. “싸워라, 구하라, 발견하라. 그리고 절대 굴하지 마라.”

1919년부터 1929년까지 그레이엄은 놀라운 속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1926년 여름, 별장에서 편안한 휴가를 즐기던 어느 주말에 빅터 형이 찾아와 그레이엄에게 모든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그 말에 그레이엄은 “모든 일이 너무 잘되고 있지 그런데 또 누가 알아? 불행의 씨앗이 우리 사이에 복병처럼 숨어있을지?” 그 달콤한 순간 1927년에 첫째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헤이즐과의 부부사이도 삐걱거리며 결혼 생활도 흔들려 별거를 하게 되고 결국 외도까지 이르게 된다. 나중에(1938년) 헤이즐과 이혼을 하게 되고…

1929년는 모두가 다 아는 대공항을 맞이하게 된다. 이 후 1932년까지 그레이엄은 자본금(250만 달러)의 거의 70%를 잃게 되는 시련도 기다리고 있었으니 불행의 씨앗을 예감한 그레이엄이 맞았다. 1933년에는 겨우 자본금 37.5만달러로 시작해야 했지만 그 해 50%가 넘는 이익을 내면서 그레이엄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슬픔은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가외의 일을 추구하던 그레이엄을 1927년 컬럼비아대학 ‘증권 분석’강의로 이끌게 되고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되는 시초가 된 셈이다. 그 강의 수강생 중 한 명이었던 데이비드 도드는 조교가 되고 7년이 지난 1934년 ‘증권 분석’의 공저자가 된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씨앗이 되어 가치투자의 아버지라는 명성의 초석이 된 셈이다.

사실 이런 긍정적인 시각은 그레이엄의 특기다. 1929년 대공항이 닥친 해에 그레이엄의 손실은 예상보다 적었다. 공매도로 헤지를 했기 때문이데 문제는 -50%를 기록한 1930년이었다. 1930년이 시작되는 겨울에 존 딕스라는 93살의 은퇴한 사업가를 만나고 당장 모든 돈을 빼라는 충고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한다. 그리고 3년간 크나 큰 고통을 겪게 되는데 자서전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레이엄 씨, 이번에 본인을 위해서라도 당신이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렸으면 합니다. 내일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세요. 그리고 곧장 사무실로 가서 보유 중인 증권을 다 파세요. 부채도 다 청산하고 자본금은 파트너에게 분배하시지요. 이런 상황에 내가 지금 당신 처지라면 밤에 한숨도 못 잘 겁니다. 당신도 그래야 해요. 지금 상황이 아주 엄중합니다. 내가 나이도 훨씬 많고 경험도 많아요. 그러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겁니다.”

어른의 말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조언 고맙다고 말하고 해주신 말씀 잘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그 노인의 말은 깡그리 무시했다. 딕스라는 노인은 거의 노망난 수준이라서 내가 하는 거래를 이해는 하는지 모르겠고 당최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늘어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딕스가 전적으로 옳았고 내가 틀렸다. 가끔 그때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 말대로 했다면 아마 걱정과 후회가 많이 줄어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 호된 시련을 겪고 난 후에 형성된 성향과 활동 특성이 또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